2025년 10월 8일 수요일

다시, 자유를 앓다

 

설교: 다시, 자유를 앓다

본문: 갈라디아서 4:8-20

핵심 표현: 해산의 수고


서론: 그 익숙한 과거로의 회귀

우리에게는 때로 뒤를 돌아보고 싶은, 심지어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은 유혹이 찾아오곤 합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새로운 관계, 새로운 지식, 새로운 습관을 쌓아 올리다가도,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과거의 익숙한 실패와 무기력 속으로 침잠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금연을 결심한 사람이 무심코 담배를 입에 물고 싶은 충동과도 같고, 건강한 식단을 다짐한 이가 한밤중 기름진 음식을 탐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전진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퇴보하는 것은 달콤하기까지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갈라디아서의 본문은, 바로 이 퇴보의 유혹 앞에 선 한 공동체를 향한 바울의 애끓는 외침입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인으로 부름받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째서인지 다시 과거의 '종노릇'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이에 바울은 분노와 안타까움을 넘어, 거의 어미의 심정과 같은 고통을 토로합니다.

이 아픈 편지를 통해,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근원적인 질문 하나를 던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왜 그토록 쉽게 자유를 버리고, 익숙한 종노릇으로 되돌아가려 하는 것일까요? 오늘 이 시간, 바울의 고통스러운 사랑의 언어에 귀 기울이며,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함께 탐색해보고자 합니다.


본론: 자유의 고통, 종노릇의 안락함

1. 기억상실의 신앙: '하나님께 알려진 바 되었거늘'

바울은 먼저 그들의 과거를 상기시킵니다. "여러분이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8절). 여기서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것들'이란, 율법의 조항들, 세상의 철학, 인간이 만들어낸 성공의 기준 등, 우리를 얽매는 모든 '초등학문'을 가리킵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는 듯 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영혼을 옥죄는 감옥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9절의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께 알려진 바 되었거늘". 우리의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붙잡는 결단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나라는 존재를 아시고, 받아주시고, 그의 자녀로 삼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나의 자격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알아주심'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시작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 엄청난 사건을 잊어버리고,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특정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행위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 조건 없이 '알려진 바 되었다'는 자유는, 실은 우리에게 불안을 주기 때문은 아닐까요? 내가 무언가를 해서 증명할 필요가 없는 상태, 나의 가치가 행위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 상태는 우리를 실존적 공허함 앞에 세울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무언가를 지키고, 행하고, 성취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종노릇'이 더 쉽고 안전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자유 앞에서 불평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모습과 같습니다. 자유에는 책임과 불안이 따릅니다. 반면 종살이에는 고통이 있지만, 명확한 규칙과 예측 가능한 내일이라는 '안락함'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성과주의, 율법주의, 혹은 세상의 성공 논리라는 익숙한 종노릇으로 돌아가, 하나님께 이미 알려진 바 되었다는 자유의 복음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진실의 적대감: '내가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바울은 논리를 넘어 감정에 호소합니다. 그는 자신이 처음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연약했던 순간을 끄집어냅니다(13-14절). 육체의 약함, 아마도 심각한 질병 가운데 있었던 바울을 갈라디아 교인들은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눈이라도 빼어줄 만큼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사랑이 식어버렸습니다. 바울은 가슴 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여러분의 원수가 되었습니까?" (16절). 이 질문은 관계의 본질을 꿰뚫습니다. 듣기 좋은 말을 해주고,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관계는 유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영혼을 위해 참된 말, 때로는 아픈 말을 해야 할 때, 관계는 시험대에 오릅니다.

갈라디아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달콤한 말로 그들을 유혹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할례도 받고 율법도 지켜야 완전해집니다." 이것은 인간의 불안한 마음에 '확실한 무언가'를 더하라는, 매우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그것은 당신들을 자유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이 진실 때문에 바울은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이들에게 '원수'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마찬가지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욕망을 정당화해주고, 우리의 편협함을 지지해주고, 우리의 나태함을 눈감아주는 거짓된 위로에 더 끌리는 것은 아닐까요? "너는 이미 하나님께 알려진 존재야"라는, 모든 자기 증명의 노력을 무너뜨리는 이 참된 복음의 말이, 때로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그 복음을 선포하는 이를 원수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3. 사랑의 고통: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마침내 바울의 감정은 절정에 이릅니다. "나의 자녀들아,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내가 다시 여러분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19절). 이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심오한 신학적, 실존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신앙의 성장은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선 자녀를 바로잡기 위해, 바울은 지금 복음을 처음 전할 때와 같은, 아니 그 이상의 영적 산고를 다시 겪고 있습니다. 이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본다는 것이 얼마나 치열하고 아픈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둘째, 신앙의 목표는 율법 조항을 지키거나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인격과 삶의 방식이 예수를 닮아가는 것, 그의 성품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부적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적 존재의 변화에 관한 문제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돌아오라고 외치는 것은, 자신의 교리적 승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 각자의 인격 안에 그리스도가 온전히 형성되기를 바라는, 어미와 같은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그들의 퇴보에 함께 아파하며, 그들의 성숙을 위해 기꺼이 해산의 수고를 감당합니다. 이 고통스러운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익숙한 종노릇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의 성숙으로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힘인지도 모릅니다.


결론: 자유를 향한 끝나지 않는 여정

오늘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끓는 편지를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이미 알려진 바 되었다는 복음의 자유가 주는 실존적 불안함. 그 불안을 피하기 위해 다시 돌아가고픈 율법과 성과주의라는 익숙한 종노릇의 안락함. 그리고 그 퇴보의 길목에서 우리를 돌이키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명쾌한 해결책으로 끝맺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내가 이제라도 여러분과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였으면 좋겠다" (20절)며 자신의 당혹감과 답답함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이는 아마도 신앙의 여정이란,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끝없이 질문하고 고뇌하며 길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말씀을 맺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형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이 고통스러운 사랑 앞에서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익숙한 종노릇의 유혹이 찾아올 때, 우리는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요?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명쾌한 정답이 되기보다, 평생을 걸어가야 할 진지하고 거룩한 질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멈추지 않으시는 그 사랑에 의지하여, 다시 한번 자유를 향한 고통스럽지만 복된 걸음을 내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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