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8일 수요일

당신의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설교: 당신의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본문: 갈라디아서 4:21-31

핵심 표현: 위에 있는 예루살렘


서론: 나의 뿌리를 묻는 질문

우리는 모두 자신의 뿌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안고 살아갑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종종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문이나 출신 학교, 혹은 소속된 집단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곤 합니다. 그것이 나의 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확실한 주소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은 율법 아래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로 이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매우 독특하고, 어쩌면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두 여인,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를 꺼내 들며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자녀입니까? 당신의 진짜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이것은 단순히 혈통에 관한 질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오래된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기댈 수 있는 두 가지 전혀 다른 삶의 원리, 두 개의 영적 세계관을 우리 앞에 펼쳐 보입니다.

이 복잡하고도 깊이 있는 비유 앞에서, 오늘 우리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함께 탐색의 여정을 떠나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영적 주소는, 우리의 진정한 어머니는 과연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본론: 두 어머니, 두 언약, 두 도시

1.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약속 (하갈과 사라)

바울이 소환하는 창세기의 이야기는 인간적인 조급함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극명하게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이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시간은 흐르고 몸은 늙어갑니다. 그들은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인간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는 것이었죠. 그렇게 태어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였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계획, 합리적인 계산의 결과물이었던 셈입니다.

반면 이삭은 어떻습니까? 그는 모든 인간적 가능성이 소멸된 자리, 사라는 단산하고 아브라함은 백 세가 되어 더 이상 생물학적 희망을 가질 수 없던 바로 그 순간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약속으로 말미암은 자'였습니다.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심, 인간의 가능성이 아닌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낳은 생명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두 아들의 출생 방식을 두 개의 언약과 연결합니다. 하갈은 시내산에서 비롯된 '율법' 언약을 상징합니다. 시내산의 율법은 우리에게 "이것을 행하라, 저것을 지켜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끊임없는 노력과 성취를 요구하는, 인간의 행위에 기반을 둔 세계입니다. 이 세계 안에서 우리는 영원히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준에 미치지 못할까 봐 늘 불안해하는 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갈이 "종 노릇 하는 지금의 예루살렘"과 같다고 말합니다.

반면 사라는 '은혜'의 언약을 상징합니다. 이 언약은 우리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으라고 초대합니다. 이 세계 안에서 우리는 자격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녀'로, '상속자'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라가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곳은 자유하는 우리 어머니의 집입니다.

2. 땅의 예루살렘과 하늘의 예루살렘

바울이 말하는 "지금의 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단순히 지리적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이것은 어거스틴이 말했던 '땅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처럼, 두 개의 실존적 현실, 두 개의 삶의 질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의 예루살렘', 즉 하갈의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논리로 움직입니다. 경쟁과 비교, 성과와 업적, 힘과 소유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곳입니다. 이곳의 종교마저도 '열심'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시도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늘 무언가를 해야 하고,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는 도시입니다.

반면 '위에 있는 예루살렘', 즉 사라의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에 기반을 둡니다. 이곳의 논리는 은혜와 선물입니다. 나의 가치는 나의 행위가 아니라, 나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선언에서 비롯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사랑받고, 이미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참된 자유와 안식이 있는 우리 영혼의 본향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두 발을 '지금의 예루살렘'에 딛고 살아가면서, 보이지 않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살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이란, 어쩌면 이 두 도시 사이의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3. 핍박하는 자와 핍박받는 자

바울은 이 비유를 통해 갈라디아 교회가 겪고 있는 현실을 날카롭게 진단합니다.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29절).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고 핍박했던 것처럼, 율법주의, 즉 인간의 노력과 공로를 내세우는 '하갈의 자녀들'이, 오직 믿음과 은혜를 의지하는 '사라의 자녀들'을 핍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서, 심지어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도 이 싸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의 노력과 의로움을 내세우려는 '육체의 소욕'은, 그저 하나님의 은혜를 잠잠히 신뢰하려는 '성령의 소욕'을 끊임없이 조롱하고 핍박합니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겠어?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어? 남들은 저만큼 하는데 너는 뭐하고 있니?" 이 내면의 목소리야말로, 우리 안에 있는 이스마엘의 목소리는 아닐까요?

자유는 불편한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율법의 세계, 하갈의 품으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결론: 당신의 영적 주소를 확인하라

말씀을 맺습니다. 바울은 "내쫓으라"는 창세기의 단호한 명령을 인용하며, 두 세계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하갈의 자녀인 동시에 사라의 자녀일 수 없습니다. 종인 동시에 자유인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 바울의 이 기나긴 비유는 우리 각자를 실존적 선택 앞에 세웁니다. 너는 누구의 자녀로 살아갈 것이냐? 너의 삶을 떠받치는 근거는 너 자신의 노력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이냐?

그래서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누구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시내산의 불안에서 나옵니까, 아니면 저 '위에 있는 예ru살렘'의 자유에서 흘러나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성찰하며, 종의 멍에를 벗고 자유인의 삶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어머니는 저 위에 있는 예루살렘,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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