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5일 일요일

가장 무거운 명령, 가장 따뜻한 약속

제목: 가장 무거운 명령, 가장 따뜻한 약속


#### **서론 (Introduction)**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의 가장 마지막,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앞에 섰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해서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거대해서 우리를 주눅 들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이 말씀을 들을 때, 솔직히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가슴 벅찬 사명감에 불타오르기보다는,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깊은 무력감과 부담감을 느끼지는 않으시는지요. 세상의 모든 민족이라니요. 제자를 삼으라니요. 이 엄청난 명령 앞에서 우리의 존재는 한없이 작게만 느껴집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어쩌면 우리가 놓치고 있었을지 모를 본문의 진짜 심장 소리를 함께 들어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감당 못 할 짐을 지우시는 '위대한 명령(Great Commission)'이기 이전에,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겠다는 '위대한 약속(Great Promise)'은 아닐까요? 이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 사명을 무거운 짐으로 여기느냐, 아니면 나와 함께 떠나는 여정으로 여기느냐?"


#### **본론 (Deep Analysis & Theological Struggle)**


**1. 모든 것은 '권위'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종종 19절의 "가라"는 명령에만 집중한 나머지,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을 놓치곤 합니다. 예수님은 명령하시기 전에 선포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18절). 이것이 모든 것의 전제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이유, 우리가 제자를 삼을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열심이나 능력, 혹은 자격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소유하셨다는 '사건'에 있습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 신학자는 교회의 모든 선포는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사명은 우리가 만들어 낸 계획이 아닙니다. 이미 온 우주의 주인이 되신 그리스도의 통치 현실을 선포하고, 그 현실 속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명의 무게는 우리가 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분이 감당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승리 위에 조심스럽게 발을 올려놓는 것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위로이자 해방이 아닐까요? 우리의 무능함과 연약함이 더 이상 사명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 말입니다.


**2. '사명'이라는 길 위에서의 구체적 삶**


그렇다면 이 권세 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본문은 "가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 동사들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삶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   **"가라"**: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모든 행위일 수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 상처받은 이웃의 고통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는 것, 나의 익숙한 세계관에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려 애쓰는 것. 이 모든 것이 '가는' 행위가 아닐까요?


*   **"제자를 삼으라"**: 우리는 이 말을 '개종'이나 '설득'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함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어쩌면, 나의 삶으로 누군가의 삶을 초대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나의 신념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흔들림과 질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들고 있는 희망을 나누며 함께 걷는 것입니다. 신학적 개념 '성화(sanctification)'를 "변화의 과정"이라는 경험의 언어로 번역해 볼 수 있듯이, 제자 삼는 것은 완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변화의 과정을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것은 지식의 주입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윤리적 교훈의 목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삶의 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가르쳐 지키게 한다'는 것은,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매일 함께 던지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그 길을 살아내려고 분투하는 공동의 몸부림일 것입니다.


이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뇌하며,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본문은 이러한 삶의 모순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현실 한가운데로 우리를 보내십니다.


**3. 모든 것을 감싸는 '약속'**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명령을 감싸 안는 예수님의 마지막 음성이 들려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0절). 이 구조가 놀랍지 않습니까? 사명은 '권세'의 선포로 시작해서 '함께하심'의 약속으로 끝납니다. 가장 무거운 명령은 가장 따뜻한 약속 안에 포근히 안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분의 현존을 힘입어서입니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 말한 '희망의 신학'처럼, 이 약속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의 약속이지만, 바로 그 미래의 약속이 현재 우리의 발걸음을 이끌어가는 힘이 됩니다.


우리가 외로울 때, 실패감에 좌절할 때, 나의 믿음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질 때, 이 본문은 우리를 판단하거나 채찍질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에게 속삭이는 듯합니다. "괜찮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신학적 개념 '구원(salvation)'이 "해방과 자유"라는 경험적 언어로 다가오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실패의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명의 성패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분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 **결론 (Conclusion)**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말씀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어깨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는 명령이기 이전에, 우리를 그분의 위대한 사역으로 초대하시는 영광스러운 초대장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초대장 가장 마지막에는 가장 중요한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겠다."


우리의 사명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우리와 함께하시는가'를 기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 진리야말로 우리가 가진 유일한 자격이며 능력입니다.


이제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이 위대한 초대에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거창한 계획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 '함께하심'의 약속을 믿음으로 살아내는 작은 몸짓 하나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쩌면 그것이 바로 세상 끝에서 시작되는 그분의 약속을 살아내는, 가장 위대한 첫걸음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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