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8일 수요일

한 사람의 고독한 감사

설교: 한 사람의 고독한 감사

부제: 구원은 왜 쓸쓸한 여정일 수 있는가?

본문: 누가복음 17:11-19


서론: 고통 속에서 하나였던 '우리'

오늘의 이야기는 열 명의 남자들이 함께 있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건널 수 없는 강을 '나병'이라는 더 깊은 절망으로 건너, '우리'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고통은 이처럼 모든 장벽을 허물고 사람을 하나로 묶는 기묘한 힘을 가집니다. 그들은 함께 소외되었고, 함께 아파했으며, 함께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공동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고통이 사라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들을 단단히 묶어주었던 '우리'라는 연대는 허무하게 깨어지고 맙니다. 아홉은 한 방향으로, 나머지 한 사람은 다른 방향으로 흩어집니다.

우리는 보통 이 이야기를 감사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으로 이해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왜 구원의 순간에 공동체는 깨어져야만 했을까요? 왜 진정한 감사는 이토록 고독한 행위로 나타나는 것일까요? 어쩌면 이 이야기는, 구원이란 본질적으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때로는 깊이 쓸쓸한 여정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본론: 각자의 길 위에서

A. 무리의 논리, 개인의 결단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치유를 확인한 순간, '무리의 논리'를 따랐습니다. 그것은 '정상성'을 회복하여 세상의 질서 안으로 복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당연한 길이었습니다. 아마 그들 중 누군가 돌아가자고 제안하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여보게, 지금 감사 인사가 중요한 게 아니야. 일단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 우리 인생이 다시 시작될 수 있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 무리의 논리에서 이탈합니다. 그의 치유는 더 이상 '우리의 문제 해결'이 아닌, '나의 존재'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신을 존재하게 한 근원에게로 먼저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이 결단은 그를 동료들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선택은 이처럼 우리를 익숙한 무리로부터 떼어내어,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만드는 고독한 결단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가 말했듯,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되는 순간입니다.

B. 예수의 쓸쓸한 질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질문을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 봅시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질문 속에는 단순히 아쉬움을 넘어선, 어떤 근원적인 '쓸쓸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열 명에게 생명의 선물을 주었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그 선물 너머에 있는 '선물 주신 이'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러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비유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이라는 보편적인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잊은 채 살아갑니까? 마치 하나님의 사랑이 응답 없는 외침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예수님의 이 쓸쓸한 질문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기다림과 그 사랑의 고독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C. 고독하기에 영광스러운 구원

왜 이 사마리아 사람의 구원은 고독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구원이 우리의 가치 체계를 전복시키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아홉 명에게 최고의 가치는 '사회적 회복'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한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삶의 궁극적인 가치가 세상의 통념과 달라질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세상 속에서 이방인이 됩니다.

단테(Dante)가 『신곡』 지옥편에서 가장 깊은 지옥을 차가운 얼음 호수로 묘사하며, 그곳이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냉소적인 자들이 갇힌 곳이라 말한 것처럼, 아홉 명은 '자신의 회복'이라는 자기중심적 기쁨에 갇혀 더 큰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한 사람은, 자기를 넘어선 초월적 존재 앞에 엎드림으로써 진정한 자유와 생명의 충만함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 길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외로워 보이지만, 바로 그 고독 속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과의 일치가 일어납니다.


결론: 거룩한 고독을 선택할 용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익숙한 신앙의 통념에 도전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 따뜻한 공동체와 소속감을 얻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그것은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야기는 구원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무리 속에 안주하는 것을 넘어, 때로는 홀로 돌아서는 고독한 결단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함께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안락하고 합리적인 '아홉'의 무리 속에 머물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때로는 동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은혜의 근원을 향해 홀로 '돌아서는' 한 사람의 거룩한 고독을 선택할 용기가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구원의 깊이는, 세상의 소란을 등지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그 거룩한 고독을 기꺼이 끌어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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