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8일 수요일

우리를 가두는 율법은 왜 필요한가?

 

우리를 가두는 율법은 왜 필요한가?

본문: 갈라디아서 3:15-22


서론: 완벽한 계획이라는 감옥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완벽한 계획을 세워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새해 아침에 세우는 금연이나 운동 계획, 자녀를 위한 교육 로드맵, 은퇴를 위한 촘촘한 재정 계획 같은 것들 말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삶, 더 올바른 삶을 위해 규칙과 법을 만듭니다. 그것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고, 목표에 도달하게 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 믿었던 그 계획과 규칙들이 어느 순간부터 우리를 옥죄는 감옥이 되는 경험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불안이 되고, 실패했을 때의 자기혐오는 우리를 더 깊은 무력감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선한 의도로 만든 법이 오히려 우리를 정죄하고 가두는 역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갈라디아서의 바울이 던지는 질문이 바로 여기에 맞닿아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아주 이상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율법’이, 우리를 ‘죄 아래에 가두었다’고 말입니다.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 왜 430년 뒤에 굳이 율법을 주셔서, 우리를 이런 답답한 현실 속에 몰아넣으신 걸까요? 우리를 가두는 이 율법은 도대체 왜 필요한 것일까요? 오늘 이 불편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을 함께 탐색해보고자 합니다.


본론: 냉혹한 진단과 약속이라는 사건

1. 진단서로서의 율법: 냉철한 현실주의

오늘 본문은 두 가지 거대한 ‘사건’을 대조합니다. 첫 번째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약속’이라는 사건이고, 두 번째는 그로부터 430년 뒤에 주어진 ‘율법’이라는 사건입니다. 바울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나중에 생긴 법이 먼저 체결된 유효한 언약을 무효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더 깊어집니다. 약속만으로는 부족했던 걸까요? 왜 율법이 필요했습니까?

바울은 19절에서 아주 냉정하게 답합니다. “율법은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율법은 생명을 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드러내기 위해 온 ‘진단서’와 같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냉철한 현실주의’**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 정도면 선하게 살고 있고, 내 노력으로 충분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율법이 다가와 말합니다. “아니, 당신은 불가능합니다.” 율법이라는 완벽한 거울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의지가 얼마나 나약한지, 우리의 동기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우리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를 비로소 직면하게 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탈출구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우리를 ‘죄 아래에 가두어’ 버립니다. 희망을 주는 대신, 철저한 절망을 선고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어쩌면 진짜 희망은, 내가 만들어낸 모든 가짜 희망이 완전히 소멸된 바로 그 자리에서만 시작되기 때문은 아닐까요?

2. 갇힌 자에게 찾아오는 약속: 진리로서의 사건

여기서 바울 신학의 위대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율법이 우리를 가두는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이것이 ‘진리로서의 사건’ 철학이 빛을 발하는 지점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지켜내야 할 규칙의 목록(율법)이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율법이라는 감옥에 갇혀 ‘나는 끝났다’고 절망하는 바로 그 실존의 현장이야말로,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는 사건의 무대가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자가 필요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는 환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바로 이 처절한 ‘필요’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노력과 가능성이 부정당하는 냉혹한 현실, 그 텅 빈 공간 속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역사적 ‘사건’으로 침투해 들어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그 약속이, 이제 율법의 감옥에 갇힌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사건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진리는 ‘무엇을 하라/하지 말라’는 명령 체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라는 복음의 사건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철저히 실패하게 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우리 밖에서 온 구원의 사건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결론: 막다른 골목에서 시작되는 길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주어졌다고 말입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철저히 갇혀 있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 주어졌다고 말입니다.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를 가두는 율법은 저주가 아니라, 어쩌면 가장 깊은 의미의 은혜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거짓된 자기 의존의 길에서 돌아서게 만드는 하나님의 냉철한 사랑입니다. 나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 막다른 골목이야말로, 약속이신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는 유일한 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당신의 삶을 가장 답답하게 가두고 있는 ‘율법’은 무엇입니까?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입니까, ‘성공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입니까, 아니면 ‘경건한 신자여야 한다’는 종교적 중압감입니까?

어쩌면 그 막다른 골목, 그 절망의 자리가 바로 약속이신 그분이 찾아오시는 은혜의 자리는 아닐까요? 우리가 갇혔다고 느끼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는 믿음의 사건이 시작될 수 있음을 함께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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