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가두는 율법은 왜 필요한가?
본문: 갈라디아서 3:15-22
핵심 표현: 죄 아래에 가두다
서론: 벗어날 수 없는 규칙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일상을 한번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규칙과 기대 속에서 살아갑니다. 직장에서는 성과라는 규칙이, 가정에서는 역할이라는 기대가, 사회에서는 성공이라는 보이지 않는 법이 우리를 옥죄어 올 때가 있습니다.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감 속에서 우리는 때로 거대한 감옥에 갇힌 듯한 답답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더 경건해야 하고, 더 많이 봉사해야 하며, 더 온전한 믿음을 보여야 한다는 율법들이 우리를 짓누르며,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리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갈라디아서의 말씀은, 바로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의 행위나 율법 준수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에 근거한다고 힘주어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이토록 은혜와 약속이 중요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일까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왜 우리를 '죄 아래 가두는' 것만 같은 율법이라는 감옥을 허락하신 것일까요? 이 질문은 단순히 2천 년 전 갈라디아 교회의 질문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실존적 물음일 수 있습니다.
본론: 약속과 율법의 기묘한 동행
1. 변경될 수 없는 약속의 우선권
바울은 먼저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사람이 맺은 약속, 예컨대 유언과 같은 문서는 한번 확정되면 누구도 그것을 무효로 하거나 내용을 덧붙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이 맺은 약속도 이러한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씨)'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여기서 말하는 단수형 '자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통찰합니다. 이 약속은 율법이 주어지기 무려 430년 전에 주어진,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의 선언이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등장한 율법이, 이 원본 계약과도 같은 약속을 폐기하거나 그 효력을 약화시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상속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약속에 의한 상속이 아니게 됩니다. 이처럼 바울은 약속이 율법보다 시간적으로나 본질적으로나 절대적인 우선권을 가짐을 분명히 합니다.
2. 율법의 역할: 우리의 실상을 폭로하는 감옥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본질적인 질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바울은 주저 없이 답합니다. 율법은 약속의 자손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범법 행위' 때문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율법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가 이미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하게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율법이라는 빛이 비치기 전까지, 우리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미움과 분노를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 안에 들끓는 욕망의 실체를 '탐심'이라는 죄로 드러냅니다.
그리고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본문의 가장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우리에게 탈출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죄의 감옥에 완벽하게 갇혀 있으며,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단 한 걸음도 빠져나갈 수 없는 존재임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냉철한 현실주의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쉬운 위로나 값싼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의 완전한 파산 상태와 절대적인 무능함을 선고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하는 실존적 절규에 이르게 됩니다.
3. 갇힘을 통해 열리는 자유의 길
그렇다면 이 감옥은 절망의 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감금이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약속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율법이라는 감옥은 우리로 하여금 창문 밖의 유일한 빛, 즉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내가 완벽하게 갇혀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의 끝에 설 때, 비로소 우리는 외부로부터 오는 구원의 손길을 갈망하게 됩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는 사람은 의사를 찾지 않지만, 자신이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은 사람만이 의사의 처방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라는 치명적인 병에 걸렸음을 진단하는 냉철한 의사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진단은 우리를 절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유일한 치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우리를 죄 아래 가두는 '사건'은, 동시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해방과 자유'라는 약속의 '사건'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됩니다. '칭의'라는 신학적 개념이 "받아들여짐"이라는 경험적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입니다.
결론: 절망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은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를 옥죄는 삶의 수많은 율법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여전히 내 노력과 의지로 그 율법의 기준을 넘어보려 애쓰며 지쳐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의 통찰은 놀랍습니다. 율법은 약속의 적이 아니라, 오히려 약속이 왜 필요한지를 알려주는 기묘한 안내자였습니다. 우리가 갇혀있다는 절망적인 깨달음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는 가장 복된 자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느끼는 그 답답함과 무력감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십자가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온전히 두 손을 내밀어야 할 바로 그 자리는 아닐까요? 우리를 가두는 모든 것들 앞에서, 역설적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붙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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