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입니다. 같은 본문이 담고 있는 또 다른 깊이를 탐색하며, 새로운 각도에서 설교를 작성해 드리겠습니다. 이전 설교들이 '치유와 구원의 차이', '구원의 고독'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본다는 것'의 의미 자체를 파고들어 보겠습니다.
설교: 한 사람은 무엇을 보았는가?
부제: 사실을 넘어 의미를 보는 믿음에 대하여
본문: 누가복음 17:11-19
서론: 모두가 똑같이 본 것
오늘의 이야기는 열 명의 눈이 똑같은 '사실'을 목격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평생을 자신들의 몸에 끔찍한 증거로 남아있던 나병이 사라졌습니다. 피부는 회복되었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깨끗해졌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객관적 사실(Fact)이었습니다. 열 명 모두의 눈은 이 놀라운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똑같은 사실을 보고서, 그들의 행동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아홉 명은 그 '사실'이 가리키는 다음 단계, 즉 '제사장에게 가는 길'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은 그 '사실' 너머에 있는 어떤 다른 것을 보고, '예수에게 가는 길'로 되돌아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똑같은 현실을 눈앞에 두고도, 왜 어떤 이는 절차를 보고 어떤 이는 근원을 봅니까? 오늘의 이야기는 단순한 감사에 대한 교훈을 넘어섭니다. 이것은 '사실'의 세계에 갇힌 시선과, 사실 너머의 '의미(Meaning)'를 꿰뚫어 보는 시선, 즉 믿음의 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아홉이 보지 못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요?
본론: 시선의 두 차원
A. 사실의 그림자를 좇은 아홉 명
아홉 명의 시선은 지극히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보았고, 그 사실은 그들에게 '사회로 복귀해야 한다'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문제 해결의 논리, 즉 'A 다음에는 B'라는 절차적 세계관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어리석은 시선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합리적이고 생존에 필수적인 시선입니다.
그러나 플라톤(Plato)의 동굴 비유를 떠올려봅시다. 동굴 속 죄수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들을 실재라고 믿습니다. 아홉 명 역시 그러했던 것은 아닐까요? '치유'라는 놀라운 사건의 그림자는 보았지만, 그 그림자를 만든 근원적인 '빛',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재를 보지 못하고, 다시 동굴 속 세상의 질서로 달려간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사실을 보는 데는 뛰어났지만, 그 사실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는 데는 닫혀 있었습니다.
B. 의미의 실체를 본 한 사람
반면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 역시 '병이 나았다'는 동일한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사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이 기적적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에게 치유는 단순히 잃어버린 건강의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받아들여 주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한 사건이었습니다.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자에게만 보이는 진실'이라는 모티브가 등장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에서처럼, 순수한 영혼에게만 신비로운 존재가 보이듯 말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왜 볼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는 유대인이자 나병환자였던 아홉 명보다 더 깊은 절망, 즉 '이방인'이라는 존재론적 소외감 속에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에게는 돌아갈 사회적, 종교적 시스템조차 온전치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을 붙들어 줄 유일한 실재,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절망의 가장 깊은 곳에서 비로소 영적인 시력은 가장 날카로워집니다.
C. 새로운 눈뜸으로서의 구원
예수님의 마지막 선언,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바로 이 새로운 '봄(Seeing)'에 대한 확증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새로운 방식의 봄'과 동의어입니다. 세상을 단지 원인과 결과, 문제와 해결책의 연속으로만 보는 물질적 시선에서 벗어나,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의미를 읽어내는 영적인 시력을 얻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sozo, 온전한 회복)의 경험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단지 깨끗한 피부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얻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밥 한 그릇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일 것이고, 스쳐 가는 바람 속에서도 창조주의 숨결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은혜'라고 부르는, 일상 속에서 초월을 보는 눈뜸의 상태입니다.
결론: 당신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실들과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성공과 실패, 건강과 질병, 기쁨과 슬픔. 우리는 이 사실들을 그저 해결해야 할 문제, 혹은 누려야 할 결과물로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다음 단계, 다음 절차로 나아가기에만 급급하여, 그 모든 사실들 뒤에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함께 생각해봅시다. 어쩌면 신앙이란, 사실들의 세계에 갇혀 있던 우리의 시선을 돌려, 그 너머의 의미를 '보는' 법을 평생에 걸쳐 배워가는 거룩한 눈뜸의 여정은 아닐까요? 그 한 사람처럼, 세상이 보는 것을 넘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그 깊고澄澈한 시력을 간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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