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8일 수요일

포로의 땅에서 평안을 구하라: 우리의 바벨론에서 살아남기

 

설교: 포로의 땅에서 평안을 구하라: 우리의 바벨론에서 살아남기

본문: 예레미야 29장 1절, 4-7절


서론: 현실이라는 이름의 낯선 땅

함께 생각해봅시다.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삶의 자리가, 혹시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벨론’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는 않으십니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폐허 위에서, 희망의 근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의 땅에서, 우리는 포로 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어쩌면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에 내몰린 직장일 수 있고, 기대로 가득했지만 이제는 냉랭함만 남은 관계의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떨쳐내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실패나 상처일 수도 있고, 거대한 사회 시스템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자리가 바로 우리의 ‘바벨론’, 우리가 유배당한 실존의 땅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예레미야의 편지는 바로 이 절망적인 바벨론 한복판에 던져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뿐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곧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달콤한 말로 백성을 현혹했습니다. 바로 그때, 예레미야를 통해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너무나도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번성하라. 그리고 너희를 사로잡아 온 바로 그 성읍, 너희의 감옥인 그 바벨론의 평안을 구하라.”

이것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즉각적인 구원이나 탈출이 아니라, 절망의 현실 한복판에 뿌리내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원수의 도시, 우리를 억압하는 그 시스템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는 이 역설적인 명령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것이 과연 신앙적인 삶의 태도일 수 있습니까?

본론: 역설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구원 방식

(A) 성경이 증언하는 ‘머무름의 영성’

성경의 이야기는 어쩌면 끊임없이 ‘바벨론’으로 들어가는 인물들의 기록일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의 삶 전체가 낯선 땅에서의 유배 생활이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려 노예로 이집트에 끌려갔지만, 그는 그 절망의 땅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의 총리가 되어 땅의 ‘평안’을 일구어냈고, 마침내 자신을 버렸던 가족까지 구원합니다. 다니엘 역시 바벨론의 심장부에서 그 나라의 신하로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벨론을 위해 일했지만 바벨론에 속하지는 않았습니다.

신약의 언어로 이것을 다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벧전 2:11)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지만, 우리의 사명은 바로 이 땅,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현실을 ‘도피’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현실 속으로 깊이 ‘침투’하여 그곳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B) 값싼 위로를 거부하는 신학적 현실주의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에게 ‘곧 끝날 것이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는 식의 값싼 희망을 팔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이런 목소리들이 넘쳐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긍정, 고통의 의미를 축소하고 현실의 아픔을 외면하게 만드는 피상적인 위로들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냉철한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지금 바벨론에 있다”고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부정하거나 미화하지 않으십니다. 칼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와 기대를 초월하시는 ‘전적 타자(Wholly Other)’이십니다. 우리의 구원 계획은 ‘즉각적인 탈출’이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 ‘고통의 현실 속에서의 거룩한 변화’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현실을 외면하는 마취제가 아니라, 가장 아픈 현실을 끌어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치열한 분투입니다.

(C) ‘평안을 구하라’는 명령의 실존적 의미

그렇다면 이 절망의 땅, 나의 바벨론에서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며 그 도시의 평안을 구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내는 것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어쩌면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직장에서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동료들에게 작은 친절을 베푸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황무지에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는 행위가 아닐까요?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불안해하는 자녀의 손을 한 번 더 잡아주고, 깨어진 관계 속에서도 먼저 용서의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바벨론에 ‘생명’의 씨앗을 심는 행위가 아닐까요?

더 나아가, ‘바벨론의 평안을 구하라’는 명령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바로 그 사람, 그 환경, 그 시스템을 위해 기도하라는 요청입니다. 이것은 결코 그들의 죄를 옹호하거나 불의에 타협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평안 속에 너희의 평안이 있다’는 말씀처럼, 나의 구원과 세상의 구원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깊은 통찰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나를 무너뜨리려는 저주와 증오의 연쇄를 끊고, 하나님의 더 큰 섭리를 신뢰하며 먼저 축복하고 기도하는 자리에 서라는 것입니다. ‘칭의’라는 어려운 신학적 개념을 경험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그것은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짐’을 신뢰하기에, 나를 거부하는 세상을 먼저 받아들이는 역설적 삶의 태도일 것입니다.

(D)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편지는 우리에게 실존적인 결단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니야’라고 불평하며, 언젠가 올지 모를 ‘예루살렘’만을 꿈꾸며 현실을 낭비하며 살아갈 것입니까? 아니면 지금 여기가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삶의 현장임을 인정하고, 이 척박한 땅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는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참된 신앙은 우리의 바벨론을 탈출하게 해주는 마법의 열쇠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바벨론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과 지혜입니다. 그것은 고통이 사라지는 은혜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능히 살아내게 하시는 ‘은혜(Grace)’, 즉 ‘살아있음의 충만하고 실질적인 경험’을 누리는 것입니다.

결론: 당신의 바벨론은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은 고통의 '면제'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의 '임재'입니다. 바벨론의 한복판에서 집을 짓고, 아이를 낳고, 그 땅의 평안을 구하라는 명령은, 가장 절망적인 현실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되는 현장이라는 역설적인 선언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절망의 자리가,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가장 거룩한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가장 깊은 절망을 통해 부활의 생명이 시작된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에서 ‘바벨론’은 어디입니까? 그곳에서 당신은 무엇을 허물고 무엇을 세우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외면하고 저주하던 바로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땅의 평안을 구하며 당신의 평안을 찾아가라고, 바로 오늘,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함께 그 음성에 귀 기울이며 우리의 바벨론에서 살아남는 지혜를 구하는 여정을 계속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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