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마음의 통합: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본문: 고린도전서 14:14-15
핵심 표현: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며
서론: 분열된 기도의 자리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고린도전서 14장의 말씀은, 초대교회 공동체 중 가장 역동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문제적이었던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정 어린 권면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 특히 방언의 은사가 넘쳐났던 곳으로 보입니다. 영적인 뜨거움과 신비로운 체험이 가득했겠지요. 그러나 그 뜨거움이 질서를 넘어서고, 개인의 신비 체험이 공동체의 유익, 즉 ‘덕’(德)을 세우는 데 실패하면서 바울의 깊은 신학적 성찰과 목회적 지도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의 중심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립 구도를 제시합니다. 바로 ‘영’(πνεῦμα)과 ‘마음’(νοῦς), 이 두 가지 차원입니다. 14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영은 기도하는데, 마음은 아무런 열매, 즉 이해와 깨달음의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고린도 교회만의 문제이겠습니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적 실존 안에도 이 분열은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날 우리의 기도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과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하지만, 돌아서면 무엇을 위해 기도했는지, 그 기도가 내 삶과 어떤 의미로 연결되는지 설명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지성적으로는 모든 교리를 이해하고 논리정연하게 기도문을 작성하지만, 정작 그 기도에는 어떠한 영혼의 울림도, 생명의 약동도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순간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영’은 뜨겁지만 ‘마음’은 닫혀 있거나, ‘마음’은 열려 있지만 ‘영’은 잠들어 있는 상태.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분열된 기도의 자리, 분열된 신앙의 실존 한가운데 서 있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본론: 통전적 기도를 향한 여정
1. ‘영의 기도’: 이해를 넘어서는 실존적 만남
바울이 말하는 ‘영의 기도’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우리의 이성과 논리,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차원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의미할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언어가 멈춘 곳,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실존의 심연에서, 바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과 만나 기도하게 하시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때로 장엄한 자연 앞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경외감에 휩싸입니다. 쏟아지는 노을을 보며, 거대한 산맥 앞에 서서, 우리는 논리적 언어가 아니라 존재 전체로 창조주를 느낍니다. 혹은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흐느낄 때, 우리의 그 신음 자체가 가장 정직한 기도가 되기도 합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가 말했듯,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와 경험 속에 갇히는 분이 아닌 ‘전적 타자’(Wholly Other)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이성(마음)이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그분을 향한 영의 몸부림, 즉 ‘영의 기도’는 신앙의 본질적인 차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분석하고 이해하는 기도가 아니라, 존재 전체로 부딪히고 만나는 ‘사건으로서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로 이 지점에서 경고합니다.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영의 기도가 아무리 깊고 신비롭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의 ‘마음’, 즉 나의 지성과 인식, 삶의 구체적인 자리와 연결되지 못할 때, 그것은 자기만족적인 신비 체험이나 공허한 종교적 열광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다른 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기도가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처럼, 개인의 삶에서 이해와 깨달음으로 이어지지 않는 영적 체험은 삶을 변화시키는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2. ‘마음의 기도’: 삶으로 번역되는 깨달음
그렇다면 ‘마음의 기도’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지성적 활동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영으로 경험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나의 구체적인 삶의 언어로 번역하고, 깨닫고, 적용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합니다. 시편 기자가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라고 고백했을 때, 그는 말씀을 ‘마음’으로, 즉 자신의 전 인격으로 이해하고 맛보았던 것입니다.
‘영의 기도’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라면, ‘마음의 기도’는 그 물을 길어다 나의 메마른 삶의 밭에 물을 대는 행위와 같습니다. “하나님, 오늘 저에게 주신 그 설명할 수 없는 평안은, 제가 직장에서 겪고 있는 불안과 어떻게 연결됩니까?”, “이유 없이 흘렸던 눈물의 의미는, 제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닐까요?” 이렇게 묻고 성찰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마음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추상적인 은혜를 구체적인 순종으로, 막연한 감동을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위험은 존재합니다. ‘마음’에만 치우친 기도는 차가운 지성주의, 생명력 없는 율법주의로 흐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을 듣기보다 자신의 논리와 분석에 갇혀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만나기보다 연구와 탐구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3.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바울의 결론은 선택이 아닌 ‘통합’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이것은 A와 B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A이면서 동시에 B가 되는 길, 즉 ‘통전적(holistic) 신앙’으로의 초대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우리의 기도는 끊임없이 영과 마음 사이를 오가는 역동적인 과정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영으로 하나님의 신비를 맛보았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마음으로 끈질기게 묻고 성찰해야 합니다. 또한 마음으로 말씀을 읽고 깨닫다가 길이 막히고 내 지성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에 나를 내어 맡기는 영의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의 기도가 기도의 ‘깊이’를 더한다면, 마음의 기도는 기도의 ‘넓이’를 확장합니다. 영의 기도가 하나님과의 수직적 만남이라면, 마음의 기도는 그 만남을 이웃과 세상과의 수평적 관계로 풀어내는 과정입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영으로 찬송의 신비에 잠기고, 또한 마음으로 그 가사를 묵상하며 삶의 결단을 다지는 것. 이것이 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성숙한 기도의 모습입니다.
결론: 영과 마음이 함께 춤추는 자리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기도와 찬송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나의 영은 기도하지만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공허함 속에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나의 마음은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영은 깊이 잠들어 있는 메마름 속에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의 권면은 우리에게 완전한 통합을 이루라고 다그치는 율법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영과 마음 모두를 통해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언어가 멈춘 곳에서 영으로 함께 기도해주시고, 우리의 깨달음이 필요한 곳에서 마음을 열어 말씀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초대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찬송이, 뜨거운 영의 고백과 맑은 마음의 깨달음이 함께 어우러지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이 자기만족의 신비주의나 생명 없는 교리주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 뜻을 헤아려 삶으로 살아내는 ‘열매 맺는 신앙’으로 자라가기를 소망합니다. 영과 마음이 함께 춤추는 그 통전적 기도의 자리로,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함께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나아갑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