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6일 월요일

당신은 누구입니까?: 은총이 부여한 이름 누가복음 1:26-38

 

본문: 누가복음 1:26-38

제목: "당신은 누구입니까?": 은총이 부여한 이름


서론: 이름들의 전쟁터

"당신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질문에 끊임없이 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명함과 이력서, 사회적 관계와 역할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습니다. 누군가의 자녀, 어떤 회사의 직원, 특정 학교의 졸업생,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시민. 세상은 이처럼 우리가 성취하고 소유한 것들을 근거로 우리의 이름을 붙여주고, 우리는 그 이름에 안도하거나 불안해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이처럼 외부의 평가와 인정에 의해 좌우되는 위태로운 구조물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마리아 역시 자신만의 이름, 자신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출신의 마리아', '요셉의 약혼녀'. 이것은 그의 사회적 좌표이자, 그의 삶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일상적이고 예측 가능한 정체성 속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이름이 들려옵니다. 천사는 그를 '마리아'라고 부르지 않고, "은혜를 받은 자여(케카리토메네, κεχαριτωμένη)"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삿말이나 칭찬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부여하시는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이름의 선포였습니다. 그의 과거와 조건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에서 비롯된 이름. 이 순간, 마리아는 세상이 붙여준 이름과 하나님이 불러주신 이름 사이의 거대한 간극 위에 서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실존적 질문, 즉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 우리를 초대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붙여준 이름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름 사이에서, 우리는 과연 누구로 살아갈 것인가?

본론: 신학적 투쟁과 실존적 결단

A. 은총의 이름: '되어진' 존재

천사가 사용한 "은혜를 받은 자여(케카리토메네)"라는 헬라어는 완료 수동태 분사형입니다. 이는 '스스로 은혜를 얻어낸 자'가 아니라, '이미 은혜를 받았고, 그 은혜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새로운 정체성은 그의 행위나 자질,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에서 비롯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체성을 구성하는 세상의 방식과 정면으로 대치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엇이 되라'(Become)고 요구합니다. 더 유능한 사람, 더 부유한 사람, 더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만 가치 있는 이름표를 얻을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는 이미 '은혜를 받은 자'라고. 너의 가치는 너의 성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너를 존재하게 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적 투쟁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머리로는 이 사실을 알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세상의 이름표에 목말라합니다. 실패하면 '실패자'라는 이름이, 가난하면 '무능한 자'라는 이름이 내 존재 전체를 규정하는 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세상의 이름표 너머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기뻐하는 자다." 이 음성을 듣는 것이야말로, 모든 불안의 사슬을 끊는 해방의 시작이 아닐까요?

B. 이름의 무게: 은총의 역설과 고통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이름은 결코 가볍거나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라는 이름은 마리아에게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통과 오해의 길을 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는 '은혜 받은 자'가 아니라 '부정한 자', '손가락질받는 자'가 될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의 새 이름은 세상의 모든 상식과 질서로부터 그를 소외시키는 역설적인 이름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축복'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피상적인 이해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적인 성공이나 만사형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 그의 신학에서 깊이 탐구했듯, 하나님의 임재는 영광스러운 권좌가 아니라 고통받는 자의 가장 낮은 자리, 십자가의 자리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마리아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즉 아들의 고난과 죽음에 가장 깊이 동참하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훗날 시므온이 예언했듯, 칼이 그의 마음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겪어야 하는 운명, 그것이 바로 '은혜 받은 자'의 실존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서늘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마저도 '은혜'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고난이 배제된, 세상의 성공과 닮아있는 '나만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이름은 때로 우리를 가장 아프고 외로운 자리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정직하게 마주해야 합니다.

C. 이름의 선택: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세상이 주는 이름과 하나님이 주신 이름 사이의 극심한 긴장 속에서, 마리아는 마침내 선택하고 결단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고백은 단순히 어떤 과업을 수락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정체성을 자신의 실존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입니다. '나사렛의 마리아'는 이제 죽고, '주님의 종'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결단입니다. '종(δούλη, 둘레)'이라는 단어는 현대적인 감각으로는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여기서는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하는 가장 능동적인 정체성의 재정립입니다. 나의 삶의 소유권, 나의 미래에 대한 결정권이 나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은 바로 이 선택의 연속일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부여한 역할과 걱정의 이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도 있고, "나는 주님의 것"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관계의 갈등 속에서 '상처받은 나'로 머물 수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도록 부름받은 주님의 종'으로 응답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실존은, 우리가 어떤 이름을 선택하고 그 이름으로 살아가기로 결단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현실이 됩니다.

결론: 당신의 참된 이름을 찾아서

우리는 모두 이름들의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너는 실패자다", "너는 부족하다", "너는 이것을 더 가져야만 한다." 그 소란스러운 외침들 속에서 우리는 쉽게 길을 잃고 우리 자신의 참된 가치를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오늘 마리아의 이야기는 그 모든 소음 너머에,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우리의 어제와 상관없이, 우리를 "은혜를 받은 자"라 불러주시는 그분의 음성 말입니다.

오늘, 세상은 당신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그리고 그 모든 소리 너머에서, 당신의 영혼 깊은 곳을 향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마리아처럼, 세상이 주는 위태로운 명함들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부여하신 그 참된 이름 안에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가장 깊은 정체성의 선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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