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왜 저주까지 선포해야 했는가?
본문: 갈라디아서 1장 1-14절
서론 (Introduction)
사도 바울의 서신서는 보통 따뜻한 감사와 축복의 기도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는 갈라디아서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그러한 온화함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자마자, 마치 불길처럼 타오르는 분노와 경악을 숨기지 않고 토로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이상하게 여긴다’(thaumazō)는 이 표현은 단순한 의아함이 아니라, 배신감에 가까운 충격과 당혹감을 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다른 복음은 없나니… 만일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선포합니다. ‘저주(anathema)’라는 단어는 신적인 파멸을 기원하는,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단어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다원주의와 관용을 미덕으로 여기는 오늘날 우리를 매우 불편하게 만듭니다. 어떻게 복음의 사도가 사랑과 용서 대신 저주를 선포할 수 있는가? 진리가 그렇게 배타적이고 독선적일 수 있는가? 이것은 종교적 광신이나 근본주의의 위험한 모습은 아닌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불편함을 성급히 외면하기 전에, 질문 자체를 바꾸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로 하여금 이토록 격렬하게, 심지어 자기 자신과 하늘의 천사까지 저주의 대상에 포함시킬 만큼, 그가 지키려 했던 복음의 핵심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하나의 복음을 ‘참된 복음’으로 만들고, 다른 하나를 ‘저주받을 다른 복음’으로 규정하는 것일까요?
본론 (Deep Analysis & Theological Struggle)
A. ‘다른 복음’의 정체: 은혜에 대한 미세한 왜곡
흥미롭게도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다”고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혼란에 빠뜨린 것은 완전히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기존의 복음을 교묘하게 “변질시키려는(metastrephō)” 시도였습니다. 역사적 정황을 볼 때, 이 ‘다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더하여 할례와 같은 율법의 조항들을 지켜야만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 + 인간의 행위’라는 공식이었던 셈입니다.
이것은 언뜻 듣기에 매우 경건하고 합리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믿음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의 실천도 중요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의 열심을 더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타협 없는 단호함으로 선을 긋습니다. 왜냐하면 은혜에 무언가를 더하려는 그 미세한 시도가 복음의 본질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다른 복음’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 + 도덕적 완벽주의’, ‘그리스도의 은혜 + 경제적 성공’, ‘그리스도의 은혜 + 종교적 열심’과 같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이 정도는 해야 하나님께 사랑받을 자격이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가 바로 ‘다른 복음’의 현대적 버전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쁜 소식(Gospel)을 다시 무거운 짐(Law)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평생에 걸쳐 싸웠던 것은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로 의로움을 제조하려는 ‘우상의 공장’이며, ‘다른 복음’은 이 공장에서 가장 세련되게 만들어진 제품과도 같습니다.
B. 복음의 수호자: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
바울이 저주까지 선포하며 복음을 수호하는 이유는, 이것이 그의 개인적인 신념이나 신학적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10절에서 자신의 동기를 분명히 밝힙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다른 복음’은 본질적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불안감을 달래주고, 행위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며, 종교적 성취감을 제공합니다. ‘이것과 저것을 행하면 구원받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는 우리의 통제 욕구를 만족시켜 줍니다. 반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공로와 가능성이 파산한 바로 그 자리에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선물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우리를 수동적인 수혜자의 자리로 낮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기꺼이 ‘사람에게 인기 없는 복음’의 종이 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C. 복음의 기원: 인간적 전통을 파괴하는 계시
바울이 이토록 확신에 찰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는 이어지는 11절 이하에서 그 복음의 기원을 자신의 삶으로 증언합니다. 그는 자신의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는 과거에 ‘내 조상의 전통’, 즉 인간적인 가르침과 전통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전통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의 삶 전체가 인간적 전통의 정점에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계시는 그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임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지식과 경험의 연장선이 아니라, 완전한 단절이요 전복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과거 전체를 부정하는 파괴적인 사건을 통해 얻은 복음이었기에, 그는 이 복음이 인간의 지혜나 전통의 산물이 아님을 온몸으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복음의 신적 기원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 셈입니다.
결론 (Conclusion)
갈라디아서의 시작은 우리에게 서늘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복음은 과연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기쁜 소식’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다시 율법의 굴레로 몰아넣는 ‘무거운 짐’입니까? 복음의 핵심인 순전한 은혜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떤 조건들을 덧붙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의 저주는 증오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독을 향한 의사의 단호한 경고와 같습니다. 은혜가 사라진 복음, 인간의 공로가 끼어드는 복음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니며,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을 상실한 채 사람들을 더 깊은 율법주의의 절망으로 이끌 뿐이라는 그의 절박한 외침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신앙의 근원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람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전통 위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이성과 기대를 뛰어넘어 내 삶에 침투해 들어온 하나님의 계시적 은혜 위에 서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 각자가 자신의 신앙을 정직하게 점검하고, 어떤 인간적인 ‘더하기’도 없는 순전한 은혜의 복음 위에 굳건히 서기를 소망합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사람의 종’이 아닌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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