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리를 홀렸는가?
본문: 갈라디아서 3:1-14
핵심 표현: 율법의 행위, 믿음으로 말미암음, 십자가의 저주, 아브라함의 복
서론 (Introduction)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갈라디아서의 시작은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바울은 다른 서신서들처럼 안부나 감사로 시작하지 않고,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는 책망으로 편지를 엽니다. 마치 애정 어린 스승이 타락한 제자들을 향해 토해내는 격정적인 외침과도 같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다급하게 만들었을까요?
바울은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라디아 교인들은 분명 성령의 뜨거운 임재를 경험하며 신앙을 시작했습니다. 어떤 행위나 자격 때문이 아니라, 그저 들려오는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그들은 다시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해야만,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 나의 노력을 통해 나의 의로움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갈라디아 교인들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처음에는 순수한 기쁨과 감사로 신앙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신앙은 내가 지켜야 할 규칙들의 목록, 내가 쌓아야 할 종교적 업적의 리스트가 되어버리지는 않았는지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를 홀리고 있는 세상의 논리는 무엇이며, 그것을 깨뜨리는 복음의 진리는 무엇인가?
본론 (Deep Analysis & Theological Struggle)
A. 눈앞에 그려진 십자가: 시작을 기억하라는 외침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단 하나, 바로 그들의 "눈앞에 밝히 보이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세상의 모든 가치 체계를 전복시키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너의 가치는 너의 성과에 달려있다." "더 노력하고, 더 성취하고, 더 완벽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의 본질일 것입니다. 이 논리에 한번 사로잡히면, 우리는 영원한 불안과 경쟁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나의 행위가 나의 구원이자 심판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홀렸다(bewitched)'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이성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영혼을 사로잡는 강력한 주술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정반대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가치는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철저히 실패한 자리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사건입니다. 성령으로 신앙을 시작했다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진리를 온몸으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나의 행위로 그것을 '마치려는' 시도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B. 아브라함의 믿음: 행위가 아닌 신뢰의 길
이 지점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조건이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경을 인용하며 그들의 논리를 뒤집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아브라함의 의는 그의 도덕적 완벽함이나 종교적 업적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약속의 아들을 얻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고, 두려움에 아내를 누이라 속이기도 한, 결코 흠 없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의로움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부르시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노력과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약속에 나의 존재 전체를 의탁하는 실존적 결단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믿음이란, 나의 불완전함과 무력함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받아주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기대는 태도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진짜 자손은 혈통이나 율법 준수가 아니라, 바로 이 아브라함의 '신뢰'를 공유하는 모든 사람이라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C. 저주와 축복의 전복: 십자가의 역설
바울의 논리는 이제 가장 깊은 역설의 지점으로 나아갑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이것은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선하게 살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이 오히려 저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율법은 '모든 일'을 '항상' 행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 앞에서 온전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율법의 길은 우리를 끊임없는 죄책감과 실패의식, 즉 '저주'의 상태로 몰아넣을 뿐입니다.
바로 이 인간 실존의 막다른 길에서, 십자가는 놀라운 전환을 만들어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율법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입니다. 가장 복되시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저주받은 자의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실패와 저주의 현실 안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들어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책감과 무력함, 죽음의 고통을 친히 짊어지심으로써, 우리를 그 모든 것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이처럼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저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경험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 축복, 즉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그 복이, 이제 모든 민족에게 열리게 된 것입니다.
결론 (Conclusion)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당신의 구원과 안정감의 근거는 무엇인가? 당신의 노력과 성취, 당신의 도덕적 깨끗함인가, 아니면 당신을 위해 저주가 되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인가?
우리는 너무나 쉽게 세상의 논리에 홀립니다. 신앙생활조차 나의 의로움을 쌓는 또 하나의 '스펙'으로 만들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은 우리를 저주 아래에 둘 뿐이며, 오직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아브라함의 축복으로, 약속하신 성령의 풍성함으로 인도한다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의 삶을 홀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공에 대한 강박일 수도 있고, 타인의 인정을 향한 갈망일 수도 있으며, 완벽주의적인 종교적 열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율법의 행위'를 내려놓고, 눈을 들어 우리 앞에 밝히 보이는 십자가를 다시 바라봅시다. 그곳에 우리의 모든 불안을 잠재우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우리의 모든 노력을 넘어서는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는 바로 그곳입니다. 우리 함께 그 믿음의 길을 다시 탐색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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