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5일 일요일

부르심, 익숙한 세계와의 결별



부르심, 익숙한 세계와의 결별

본문: 창세기 12:1-2

핵심 표현: 떠남(Lech-Lecha), 보여 줄 땅, 복의 근원


서론: 바벨탑의 그림자 아래서

함께 생각해봅시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12장의 말씀은, 바로 앞 11장의 거대한 사건 직후에 등장합니다. 11장은 인간의 이야기, 바벨탑의 이야기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에 닿으려 했던 사람들, 흩어짐을 면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벽돌을 쌓아 올렸던 이들의 이야기이지요. 그것은 ‘안주’와 ‘자기 확장’을 향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보여주는 장엄한 실패의 기록입니다.

바로 그 실패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서, 하나님은 한 사람,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의 첫마디가 참으로 이상합니다. 탑을 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내는 비결을 알려주시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떠나라(Lech-Lecha)”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진 말씀입니다. 이 고대의 부르심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을까요? 안정된 직장, 익숙한 인간관계, 예측 가능한 내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우리에게 ‘떠남’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본론: 실존의 지도를 찢어버리는 목소리

1. 무엇을 떠나야 하는가: 나의 ‘아버지의 집’은 어디인가?

본문은 떠나야 할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시합니다. 고향, 친척, 그리고 아버지의 집. 이것들은 단순히 지리적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모든 것, 그의 안정감과 소속감의 근원 전체를 가리킵니다.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증명해주던 모든 관계와 배경, 문화와 가치관, 그 익숙한 세계 전체로부터의 결별을 요구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아버지의 집’은 어디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나의 지성, 나의 경험, 내가 쌓아 올린 학위나 경력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나의 정치적 신념, 내가 속한 집단의 이데올로기,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성공의 논리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나다’라고 규정하며, 그 안에 안주하고 나를 증명하려 했던 모든 견고한 자아의 성벽,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떠나라고 명하시는 ‘아버지의 집’은 아닐까요?

우리는 모두 바벨탑을 쌓던 이들의 후예입니다. 나의 이름, 나의 안전, 나의 영광을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쌓아 올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모든 것을 해체하는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은 평온한 일상의 파괴이며, 실존의 근간을 뒤흔드는 지진과도 같은 사건입니다.

2.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약속, 그 불확실한 목적지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지명을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이라고만 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믿음을 ‘불확실성 속으로의 도약’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람의 여정이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요? 그의 발걸음은 지도 위에 그려진 확실한 길이 아니라, 오직 부르시는 그분의 목소리, 그 약속 하나에만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의 안전은 소유나 계획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에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보여 줄 땅’은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는 기복적인 약속의 땅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계획과 통제가 무너진 자리, 나의 합리성과 예측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광야에서 비로소 경험되는 새로운 존재 방식일 수 있습니다. 이미/아직(Already/Not Yet)의 긴장 속에서, 완성된 목적지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순례를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보여 줄 땅’을 향해 가는 제자의 길이 아닐까요? 칼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 세계 너머에 계신 ‘전적 타자(Wholly Other)’이시기에, 그분이 인도하시는 길 또한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수밖에 없습니다.

3. 왜 떠나야 하는가: 저주를 끊고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 가혹해 보이는 명령 뒤에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여기서 우리는 바벨탑의 기획과 하나님의 기획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합니다. 바벨탑의 인간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내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쌓아 올린 이름은 결국 흩어짐과 혼돈(바벨)으로 귀결되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자에게 주어진 이름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신학적 언어로 ‘칭의’는 바로 이런 ‘받아들여짐’의 경험입니다. 내가 나를 증명하는 것을 멈출 때, 나의 의(義)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나를 내어드릴 때, 비로소 나의 존재는 나 자신을 넘어 타인을 향한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떠남은 상실이 아니라, 진정한 존재의 시작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나의 작은 세계에 갇혀 있던 저주받은 실존이, 온 세상을 향해 열린 축복의 근원이 되는 전환점, 그것이 바로 ‘떠남’이라는 부르심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결론: 당신의 ‘우르’는 어디입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브람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민족의 기원에 대한 고대 설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의 실존적 원형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의 ‘우르’를 떠나라. 너의 견고한 ‘하란’을 떠나라.”

우리는 끊임없이 안주하려는 유혹과 떠나라는 부르심 사이의 긴장 속에 서 있습니다. 나의 지성과 경험이라는 아버지의 집이 주는 안락함은 달콤하지만, 그것은 결국 우리를 바벨탑의 운명 속에 가둘 뿐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붙들고 있는 것, 이것 없이는 ‘나’를 증명할 수 없다고 믿는 당신의 ‘아버지의 집’은 무엇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어디를 떠나라고 말씀하고 계실까요?

그 부르심 앞에서 우리의 익숙한 실존의 지도를 찢어버리고, 불확실하지만 약속이 이끄는 그 땅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딜 때, 비로소 우리는 흩어지는 이름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함께 그 부르심의 여정을 계속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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