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8일 수요일

불과 물을 지나, 풍요에 이르다

시편 66:1-12

제목: 불과 물을 지나, 풍요에 이르다


서론: 이해할 수 없는 찬양의 요구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66편은 온 땅을 향한 장엄한 찬양의 초대로 시작합니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이 얼마나 힘차고 명쾌한 요구입니까? 마치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웅장한 서곡을 연주하듯, 시인은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해 창조주를 향한 환호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우리의 시선을 돌려, 소란스러운 세상의 헤드라인과 우리 자신의 고요한 내면을 들여다봅시다. 온 땅이 과연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내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그 이름의 영광을 영화롭게 찬송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마 많은 경우,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질병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관계의 단절이 가져온 깊은 외로움에 잠겨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생존의 무게에 짓눌려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조차 잃어버렸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편 66편은 우리에게 당혹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10절 이하의 고백은 이 찬란한 서곡과는 전혀 다른, 어둡고 무거운 현실을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 위로 지나가게 하셨나이다.” 그물, 무거운 짐, 짓밟히는 모욕, 그리고 마침내 불과 물. 이것이 시인이 통과해온 삶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이처럼 모순되어 보이는 현실,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찬양의 요구와, 그 하나님이 허락하신 듯한 고통의 경험 사이의 깊은 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불과 물을 지나는 실존적 고통 속에서, 과연 ‘찬양’이란 가능한 것일까요?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와 함께 탐색하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본론: 고난의 신학적 재해석

A. 고통의 현실, 그리고 그 주어(主語)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미화하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고난의 실체를 매우 구체적인 이미지로 그려냅니다. ‘그물에 걸렸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함정에 빠진 상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절망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짐’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과 실패의 무게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머리 위로 지나갔다’는 것은 인간적인 멸시와 굴욕, 존재가 부정당하는 듯한 깊은 상처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은 ‘불과 물을 통과하는’ 극한의 시련으로 요약됩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그물과 짐, 그리고 우리를 짓밟고 지나가는 세상의 권력 앞에서 무력감을 느낍니다. 우리의 합리성과 노력은 이 불과 물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립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이 고통의 현실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신앙이란 단순히 이 모든 고난을 면제받는 특권입니까? 아니면 고통이 없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가 무너졌을 때 함께 폐기되어야 할 낡은 위로에 불과합니까?

그러나 시편 기자는 여기서 충격적인 신학적 반전을 감행합니다. 그는 이 모든 고통의 경험 앞에 한 존재를 주어로 세웁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셨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단련하셨습니다.” 세상의 논리라면 이 고통은 무작위적인 불행이거나, 악한 자들의 소행이거나, 혹은 나의 실수로 인한 결과여야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모든 것의 배후에서 침묵하시는 듯 보이는, 그러나 엄연히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고통의 원인 제공자로 고발하는 원망의 언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의미 없어 보이는 고통의 파편들을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라는 틀 안으로 가져오려는 처절한 믿음의 투쟁입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가 말했듯,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기대로 가두어 둘 수 없는 ‘전적 타자(Wholly Other)’이십니다. 그분의 방식은 우리의 합리성을 초월합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나의 이해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결단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B. ‘단련’으로서의 시련, ‘풍요’를 향한 과정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이 불과 물 속으로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본문은 그 목적을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다”라고 설명합니다. 용광로 속의 은은 불순물이 모두 타버린 후에야 비로소 순수한 가치를 드러냅니다. 이 비유는 고통이 단순한 징벌이나 무의미한 시련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더 깊고 순수하게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일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갑니까? 우리의 건강, 우리의 재물, 우리의 지성, 우리의 관계망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 믿으며, 그것들을 쌓아 올리는 데 평생을 바칩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의 주인공 파홈처럼, 우리는 더 많은 소유가 곧 더 큰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불과 물의 시련이 닥쳐올 때, 우리가 굳게 믿었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건강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재물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며, 인간관계는 우리를 배신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폐허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나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부인적 지성(Self-Denying Intellect)’의 문턱을 넘어서게 됩니다. 나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던 교만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만 의존하는 실존적 가난함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불과 물의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누구에게 의존해 살아야 하는지를 처절하게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장소는 아닐까요? 세상의 모든 ‘풍요’가 거짓 신기루였음을 폭로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심을 배우게 하는 거룩한 교실은 아닐까요?

C. 구원의 사건성: 홍해를 건너는 기억

시인은 이 고통의 과정을 설명하며, 갑자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기억을 소환합니다. “주께서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이것은 출애굽 사건에 대한 회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홍해는 절망의 끝이었습니다.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서는 거대한 물결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차단된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는 ‘불가능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 역사적 기억의 삽입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고난이 고립된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역사라는 네트워크 안에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라는 ‘물’과 광야라는 ‘불’을 통과하여 약속의 땅에 이르렀던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고난 역시 궁극적인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진리는 추상적 명제가 아니라, 이처럼 구체적인 ‘사건’으로 우리에게 경험됩니다. 과거의 구원 사건은, 현재의 고난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고 미래의 소망을 약속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과 물 한가운데를 지날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곳이 나의 끝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히려 이곳은 나의 힘이 소진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시작되는 ‘홍해 앞’일 수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가장 깊은 절망의 밑바닥에서야 비로소 구원의 빛을 발견하는 역설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결론: 십자가의 불, 부활의 풍요

시인은 마침내 이 길고 어두운 터널의 끝을 선언합니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요로운 곳에 들이셨나이다.” 여기서 ‘풍요로운 곳(a place of abundance)’이란 단순히 물질적 번영이나 고통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든 시련을 통과한 후에 도달하게 되는 새로운 차원의 영적 깊이와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불과 물을 통과하며 ‘나’라는 존재의 불순물은 다 타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기뻐할 수 있는 존재론적 자유를 얻게 된 상태입니다. 마치 설거지를 하거나 밥 한 그릇을 앞에 두고도 그 안에 깃든 창조의 신비를 느끼며 충만해지는 것과 같은 ‘살아있음의 실질적인 경험’입니다.

이 시편의 여정은 궁극적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깊은 불과 물을 통과하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와 고통, 멸시와 굴욕을 친히 짊어지신 ‘불과 물’의 절정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시며 가장 깊은 고독과 단절을 경험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노력과 자기 의(義)가 완전히 파산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깊은 물 속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부활의 아침으로 끌어내셨습니다. 이것이 인류에게 허락된 궁극적인 ‘풍요로운 곳’입니다. 십자가의 처절한 실패와 죽음을 통과하여, 영원한 생명의 풍요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앞에 놓인 불과 물의 시련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가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시며, 그 고통을 통해 우리를 빚어 가시고, 마침내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풍요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 모든 것을 알고 믿는다면, 우리의 찬양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우리의 찬양은 더 이상 고통 없는 삶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불과 물 속에서도 우리를 붙드시고, 단련하시며, 마침내 풍요로운 곳으로 이끄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선포가 될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을 짓누르는 불과 물의 무게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고통의 한복판에서, 이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시작된 저 ‘풍요로운 곳’을 향한 하나님의 이끄심을 어떻게 신뢰하며 걸어가시겠습니까?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이 다시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포로의 땅에서 평안을 구하라: 우리의 바벨론에서 살아남기

 

설교: 포로의 땅에서 평안을 구하라: 우리의 바벨론에서 살아남기

본문: 예레미야 29장 1절, 4-7절


서론: 현실이라는 이름의 낯선 땅

함께 생각해봅시다.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삶의 자리가, 혹시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벨론’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는 않으십니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폐허 위에서, 희망의 근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의 땅에서, 우리는 포로 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어쩌면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에 내몰린 직장일 수 있고, 기대로 가득했지만 이제는 냉랭함만 남은 관계의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떨쳐내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실패나 상처일 수도 있고, 거대한 사회 시스템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자리가 바로 우리의 ‘바벨론’, 우리가 유배당한 실존의 땅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예레미야의 편지는 바로 이 절망적인 바벨론 한복판에 던져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뿐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곧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달콤한 말로 백성을 현혹했습니다. 바로 그때, 예레미야를 통해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너무나도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번성하라. 그리고 너희를 사로잡아 온 바로 그 성읍, 너희의 감옥인 그 바벨론의 평안을 구하라.”

이것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즉각적인 구원이나 탈출이 아니라, 절망의 현실 한복판에 뿌리내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원수의 도시, 우리를 억압하는 그 시스템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는 이 역설적인 명령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것이 과연 신앙적인 삶의 태도일 수 있습니까?

본론: 역설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구원 방식

(A) 성경이 증언하는 ‘머무름의 영성’

성경의 이야기는 어쩌면 끊임없이 ‘바벨론’으로 들어가는 인물들의 기록일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의 삶 전체가 낯선 땅에서의 유배 생활이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려 노예로 이집트에 끌려갔지만, 그는 그 절망의 땅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의 총리가 되어 땅의 ‘평안’을 일구어냈고, 마침내 자신을 버렸던 가족까지 구원합니다. 다니엘 역시 바벨론의 심장부에서 그 나라의 신하로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벨론을 위해 일했지만 바벨론에 속하지는 않았습니다.

신약의 언어로 이것을 다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벧전 2:11)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지만, 우리의 사명은 바로 이 땅,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현실을 ‘도피’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현실 속으로 깊이 ‘침투’하여 그곳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B) 값싼 위로를 거부하는 신학적 현실주의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에게 ‘곧 끝날 것이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는 식의 값싼 희망을 팔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이런 목소리들이 넘쳐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긍정, 고통의 의미를 축소하고 현실의 아픔을 외면하게 만드는 피상적인 위로들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냉철한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지금 바벨론에 있다”고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부정하거나 미화하지 않으십니다. 칼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와 기대를 초월하시는 ‘전적 타자(Wholly Other)’이십니다. 우리의 구원 계획은 ‘즉각적인 탈출’이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 ‘고통의 현실 속에서의 거룩한 변화’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현실을 외면하는 마취제가 아니라, 가장 아픈 현실을 끌어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치열한 분투입니다.

(C) ‘평안을 구하라’는 명령의 실존적 의미

그렇다면 이 절망의 땅, 나의 바벨론에서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며 그 도시의 평안을 구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내는 것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어쩌면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직장에서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동료들에게 작은 친절을 베푸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황무지에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는 행위가 아닐까요?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불안해하는 자녀의 손을 한 번 더 잡아주고, 깨어진 관계 속에서도 먼저 용서의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바벨론에 ‘생명’의 씨앗을 심는 행위가 아닐까요?

더 나아가, ‘바벨론의 평안을 구하라’는 명령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바로 그 사람, 그 환경, 그 시스템을 위해 기도하라는 요청입니다. 이것은 결코 그들의 죄를 옹호하거나 불의에 타협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평안 속에 너희의 평안이 있다’는 말씀처럼, 나의 구원과 세상의 구원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깊은 통찰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나를 무너뜨리려는 저주와 증오의 연쇄를 끊고, 하나님의 더 큰 섭리를 신뢰하며 먼저 축복하고 기도하는 자리에 서라는 것입니다. ‘칭의’라는 어려운 신학적 개념을 경험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그것은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짐’을 신뢰하기에, 나를 거부하는 세상을 먼저 받아들이는 역설적 삶의 태도일 것입니다.

(D)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편지는 우리에게 실존적인 결단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니야’라고 불평하며, 언젠가 올지 모를 ‘예루살렘’만을 꿈꾸며 현실을 낭비하며 살아갈 것입니까? 아니면 지금 여기가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삶의 현장임을 인정하고, 이 척박한 땅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는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참된 신앙은 우리의 바벨론을 탈출하게 해주는 마법의 열쇠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바벨론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과 지혜입니다. 그것은 고통이 사라지는 은혜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능히 살아내게 하시는 ‘은혜(Grace)’, 즉 ‘살아있음의 충만하고 실질적인 경험’을 누리는 것입니다.

결론: 당신의 바벨론은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은 고통의 '면제'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의 '임재'입니다. 바벨론의 한복판에서 집을 짓고, 아이를 낳고, 그 땅의 평안을 구하라는 명령은, 가장 절망적인 현실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되는 현장이라는 역설적인 선언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절망의 자리가,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가장 거룩한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가장 깊은 절망을 통해 부활의 생명이 시작된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에서 ‘바벨론’은 어디입니까? 그곳에서 당신은 무엇을 허물고 무엇을 세우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외면하고 저주하던 바로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땅의 평안을 구하며 당신의 평안을 찾아가라고, 바로 오늘,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함께 그 음성에 귀 기울이며 우리의 바벨론에서 살아남는 지혜를 구하는 여정을 계속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불과 물을 지나, 풍요에 이르다

시편 66:1-12 제목: 불과 물을 지나, 풍요에 이르다 서론: 이해할 수 없는 찬양의 요구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66편은 온 땅을 향한 장엄한 찬양의 초대로 시작합니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